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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들(2015.9.2 ~ 11.13)
artkee  (Homepage) 2015-11-13 15:48:05, 조회 : 557, 추천 : 158

<쨍하게>
"작은 풍선을 그리는데 0호부터 30호 이상의 평붓까지 모두 사용합니다. 그 단순한 모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섬세하고 복잡한 붓질을 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상자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야 합니다. 지저분한 팔레트도, 닳아 뭉그러진 붓도,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도, 작업실에 나뒹구는 라면 봉지도, 화가 자신도 모두 캔버스 뒤에 숨어야 합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볍고 단순한 풍선 그림이 감상자 앞에 '쨍' 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낙서도 불필요합니다.(2013. 1.)"
몇 년 전 낙서를 다시 읽자니 민망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쨍한 그림은 없고 라면 봉지만 너풀거립니다. 뭐는 안 그렇겠습니까마는, 그림에서 주제를 강조하려면 먼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때로는 밤낮없이 그린 걸 싹 덮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캔버스에 매달려 그리다 보면 불필요한 요소들이 들러붙는데도 그걸 야멸치게 지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그렸으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고생한 티를 내고 싶은 건데요, 그림이 구질구질하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릅니다. (9/2)



<행복>
'구석기인과 청동기인 중에 누가 더 행복했을까?' 사회 시간에 이 주제로 글쓰기 숙제를 냈더니 다수가 구석기인이 행복했을 거라고 썼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던 구석기인의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웠을 거라네요. "편리함을 생각하면 청동기인들이 좋았겠지만, 구석기인들이 훨씬 자유롭게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구석기인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편리함보다 자유로움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구석기인들이 더 행복했는지 검증할 길은 없으나, 날카로운 무기와 더불어 강한 압제와 폭력에 노출되었을 청동기인들의 행복은 점점 소수의 지배권력으로 집중되었을 거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다음 사회 시간에는 '현대인의 삶과 행복'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토론회를 하려 합니다. (9/3)



<국방부>
한 대를 실전 배치하는 데만 600억 원, 국방부가 신형보다 더 비싼 고물 비행기 12대를 구매하기로 확정했답니다. 아, 7,200억이면... 세금 걷어서 이렇게 해 처먹어도 국민은 속수무책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사려고 지난번 남북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북한 잠수함 행방이 어쩌고 하면서 설레발을 떨었나 봅니다.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네요. (9/7)



<극한 직업?>
요 며칠 저희 반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가 찍었다면 '극한직업' 한 편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나름 총애하는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아이가 선생님으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며 아침부터 운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저는 담임으로서 그 학생에게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어제 오전에는 칼을 가지고 놀다가 짝의 손바닥에 7cm 정도의 상처를 남긴 학생, 오후에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학생과 씨름하느라 '찐'을 다 뺐습니다. 오늘은 거짓말 때문에 상담했던 학생과 다른 일로 상담하는데 이 녀석이 이성을 잃고 대들어서 하마터면 주먹이 나갈 뻔했습니다. 겨우 수습하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한 학생이 '똥침'을 당해서 누운 채 울고 있었습니다. 사건을 수습하느라 출장 갈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스스로 촬영할 수 있었다면 괜찮은 다큐 하나 나오는 건데 아쉬웠어요. 이번 달 월급은 500원 더 받아야 합니다. (9/9)



<내시경>
아니, 돈 더 주고 수면내시경 신청했는데 마취도 되기 전에 들쑤시는 경우가 어딨나? 검사 끝나니까 그제서야 졸림. 이런 거 처음 해봐서 그러는데 원래 그런가요? 또 의사가 병변 일부를 제거했다고 5만 원을 추가로 수납하던데 창자에 이름표가 달린 것도 아니고...이럴 바에야 '쌩내시경' 하면서 눈 부릅뜨고 모니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든지 해야지. (9/15)



<안도감>
오늘 강남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도중에 세월호가 나에게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이 쏟아져 한참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청중에게는 뜬금없는 눈물일 수도 있지만, 내심 안도했습니다. 세월호가 아직 내 안에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 (9/18)



<개인전 약속>
개인전 날짜를 잡았습니다. '갤러리 탐' 초대로 내년 2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이 갤러리는 '탐앤탐스'에서 문화예술지원사업으로 운영하는데 저의 '풍선, 마네킹 연작'이 그 공간과 잘 어울릴 듯합니다. 오늘은 작업실에 안 가려 했는데 저녁 먹고 가야겠습니다. (9/19)



<스프레차투라>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미켈란젤로의 말. (아트인문학 여행, 202쪽 인용)
"데코로 없이는 스프레차투라도 없다." 데코로는 구상하고 고심하고 연습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스프레차투라는 의도된 편안함을 일컫는 이탈리아어. (10/1)



<홀가분>
어제 14년 째 해오던 일 하나를 마무리했더니 홀가분합니다.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진즉 그만뒀어야 했습니다. 그만둘 일이 더 있습니다. (10/27)



<이정현 의원>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습니까? 이렇게까지 안 해도 먹고 사실만 하잖아요. 좀 어지간히 하세요. (11/28)



<송곳>
드라마 '송곳 3화'에 구고신(안내상 분) 소장이 노동조합법에 대해 강의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독일의 초등학교에서는 단체협상 모의실습을 연 6회 실시하고, 프랑스 고등학교 사회 수업 3분의 1이 노동조합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노동자, 노동조합이라는 말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노조 가입률이 세계 최저 수준인 현실도 그렇고, 노동조합을 좌파나 종북과 연관짓는 몰상식한 인식은 우리의 공교육이 낳은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 교과서는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너무 오른쪽에 치우쳤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5분 정도의 드라마 영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상식에서 멀어져 있는지 집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캡쳐해서 저희 학교 전교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저작권 때문에 공유하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11/2)



<오디오>
작은 중고 스피커 하나 들였습니다. 오디오인터페이스에 연결해서 고음질 음원을 들어봤습니다. 작업실이 새로운 공간이 된 느낌입니다. 박스에 넣어둔 cd들을 다시 꺼내야겠습니다. (11/2)



<국정교과서>
결국, 국사교과서 국정화가 고시됐네요. 이미 언론을 장악했겠다, 지지율도 어느 정도 유지되겠다, 자기들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야당까지 지리멸렬이니 뭐든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된다고 보았겠지요. 거짓말에 거리낌이 없고 거짓이 드러나도 부끄러운 줄도 몰라요.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발등을 제대로 찍었다고 봅니다. 거대한 역풍이 새누리당과 이 정권을 타격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좌우 이념을 떠나 국민을 대놓고 무시하면 큰코다친다는 걸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1/5)



<고민>
제가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 찧는 소리를 자주 하기는 하지만, 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을 배제하고 제가 존재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앙에 투철한 삶을 사느냐, 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동안 교회를 떠난 신앙은 제 선택 옵션에 없었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교회라도 그 안에 속하고 있을 때 더 신앙이 성숙한다고 배웠습니다. 공동체에서 분리된 채 홀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로부터 원심력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11/9)



<가정교회>
제가 몇 년 경험했던 가정교회는 양날의 칼 같은 거였습니다. 처음에 가정교회에 참여하면서 '이거다!' 했습니다. 가정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와 목회자의 위계적 구분이 거의 무의미했어요. 평소 권위적인 강단권력에 거부감이 컸던 저로서는 가정교회에 크게 환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정교회운동이 한국 교회의 목회자 중심적인 문화를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지요. 한편으로는 '이거 하다가 그만두면 더는 갈 곳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가정교회는 얼마 못 가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가정교회 확산에 따른 강단권력의 위기감이 작용한 게 컸다고 보았습니다. 가정교회에 걸었던 기대는 고스란히 기성 교회와 강단권력에 대한 냉소로 되돌아왔습니다. 가정교회를 어설프게나마 경험하고 나니 교회의 불합리한 면이 더 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목장, 속회, 구역, 셀 등, 소그룹 조직을 운영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각 소그룹의 독립성은 거의 없고 리더들도 담임목사의 수족 역할에 머물기 일쑤입니다. 소그룹의 구조와 작동 방식이 다단계 회사의 그것과 별로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 조직은 저의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11/10)



<한 학부모>
매일 같이 저에게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하는 학부모가 있습니다. 문자메시지를 받아보면 아이에 대한 푸념으로 가득합니다. 제때 안 들어온다, 발을 잘 안 씻는다, 돈을 함부로 쓴다, 물건을 잃어버린다, 전화 요금이 많이 나온다... 이런 내용이지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 사진을 보내면서 담임인 저에게 전화상으로 훈계해달라기도 합니다. 아이와 통화하는 동안 전화기 너머로 소리 지르는 엄마 목소리 때문에 대화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근무 시간 외에 학부모의 전화를 받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분에게는 정성껏 반응하려고 노력합니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데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하루 품삯 받아서 두 아들을 키우고 있거든요. 몸도 성치 않아서 이런저런 약을 달고 산다고 하네요. 인생이 고단하고 답답하니까 저에게라도 하소연하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군요. 다소라도 그분에게 위안이 될까 싶어서 오는 전화 받아주고 문자메시지에 상투적이나마 답글을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소식이 없네요. (11/11)



<누드 크로키>
명색이 그림쟁이인데 누드화를 제대로 못해봤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진을 보고 몇 점 작업한 적은 있으나 실제 모델을 세우고 그린 적은 없었어요. 비용도 비용이지만, 벌거벗은 여성 앞에서 이젤을 펼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 신앙 관념과도 잘 맞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근래 지인의 작업실에서 누드 크로키를 한다기에 용기를 내서 참여했습니다. 크로키 초반에는 선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더군요. 30년 가까이 붓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크로키 경험이 별로 없는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육체가 주는 긴장감을 떨치기 어렵더군요. 포즈가 바뀌고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점 인체의 아름다운 곡선에 몰입되었습니다. 그동안 인공적인 물체들만 그리다가 살아 있는 인체를 접하니 그린다는 행위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해볼 생각입니다. (11/12)



<수능>
벌써 2년 전 일입니다만, 제 아이가 수능을 끝냈을 때 마치 끝없는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그보다는 감옥에서 출소한 기분이었어요. 현대판 신분제도를 확대 재생산하는 대학입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살피면 그 중심에 대학입시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기괴한 시스템에서 고생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생각하면 교육계에서 밥벌이하는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 웃으면 누군가는 울어야 하는 상대평가에서 누군가의 행운을 비는 게 정당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주변의 수험생들이 이번 수능에서 다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11/12)



<우울>
어제는 마음이 우울한 채로 보냈습니다.
옆 반 선생님이 늦는다고 하여 제가 그 반에 가서 잠시 학생들을 챙기고 있는데, 저희 반 한 학생이 복도를 지나가면서 "우리 선생님이 옆 반에 가셨네, 앗싸~!" 이러는 겁니다. 평소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이 입에 붙은 아이예요. 이 녀석의 툭툭 내뱉는 말, 뭘 해도 시큰둥한 표정이 거슬릴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성격상 그러질 못하겠더군요. 내가 그 아이한테 뭘 잘못했나, 곱씹다가도 그 녀석에게 마음 쏟았던 일을 떠올리며 괘씸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내가 맡은 아이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교사라니. 물론 대다수 학생은 그 아이와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반응이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건 이 직업이 가진 특성이라고 해야겠지요. 명예퇴임 나이가 다가오는 게 싫지만은 않습니다.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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